본질적으로 기행 영화이며, 기록물이라 불렸던 것들을 최초로 만든 영화인은 1890년대의 뤼미에르 형제였다. 30년 후 영국의 영화감독이자 비평가인 존 그리어슨은 이 용어를 로비트 플레허티의 <모아나(1926)>에 적용하기로 했다. 그리어슨은 1930년대 영국 다큐멘터리 영화 그룹의 설립자이며, 다큐멘터리의 본질을 정의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이론가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다큐멘터리는 현실에 대한 창조적 반응임과 동시에 정보, 교육, 선전의 수단이어야 한다.
1940년대 말 린제이 앤더슨을 비롯한 영국 프리 시네마의 일원들은 그리어슨의 아카데미즘적인 태도를 격렬하게 비난한다. 이들에 따르면 사회적 선전 도구로서 다큐멘터리를 사용한 것이 영화의 미학적 가치를 제거했고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지적인 오만과 사회적 엘리트주의를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다는 것이다.
지금 와서 보면 그리어슨의 입장이 엘리트주의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우리가 1920년대 말의 시대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적어도 그러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18년 이후 미국과 마찬가지로 영구에서는 대중 민주주의에서 진보가 이루어졌다. 1928년 영국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선거에서 동등한 권리르 갖게 되었다. 1924~1927년 미국에서 활동했던 그리어슨은 대중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인들의 지대한 관심에 충격을 받았다. 선거권이 동등하게 주어졌지만 막상 대중 교육이 부재해 일반 선거권자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잘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리어슨은 여기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어슨과 마찬가지로 공공 기관의 일부 사람들도 영화를 통한 교육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2차 대전 중 험프리 제닝스의 영화를 통해서 나타났다. 제닝스는 원래 초현실주의, 마르크스주의, 문학 및 과학에 관심이 있는 시인이자 화가였다. 노동의 고귀함을 강조했지만 사회적 맥락으로부터는 분리된 (그리어슨의) 자유주의적 엘리트주의와는 달리, 제닝스의 영화는 일상 생활과 평범한 남성/여성의 목소리에 중점을 두었다.
런던 밖으로 나간 최초의 다큐멘터리 작가였던 그는 영국 북부 지방에 가서 산업 노동자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산업 혁명과 그것이 영국, 영국 국민들에게 미친 결과들이었다. 제닝스의 영화 대부분은 대중 관찰 단체를 위해 만들어졌다. 이 단체는 일반 사람들의 삶과 감정을 기록함으로써, 그들을 관찰하고자 하는 좌익 사상가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제닝스의 자세한 관찰은 시적이고 초현실적인 특성도 가지고 있었는데, 산업 국가인 영국의 이미지를 촬영하고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미지를 여기에 병치시키는 방식으로 보여 주었다.
다른 문화를 기록하는 전통은 뤼미에르 형제의 기행 영화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전통에서 최초의 다큐멘터리 작가는 로버트 플레허티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은 플레허티가 에스키모의 생활을 다룬 <북극의 나누크(1922)>이다. 또한 그는 그리어슨을 위해 <산업국가 영국(1931~1932)>라는 영화를 감독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놀랍게도 그의 낭만적 세계관이 잘 드러나 있다. 1920년 소련에서는 <키노-프라우다>를 위해 만든 지가 베르토프의 다큐멘터리들이 소련의 변화를 기록했다. 흥미롭게도 그의 작업에서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영국의 두 경향의 전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어슨과 비슷하게 베르토프도 다큐멘터리를 교육적 도구로 보았지만, 그의 스타일에서는 우리가 제닝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지에 대한 미학적인 집착이 보인다. 그의 스타일은 거의 해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몽타주를 통한 아방가르드적 형식주의를 표방한다. 1930년대 소련 영화감독 알렉산더 I. 메드베드킨은 새로운 차원으로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발전시킨다. 그는 소련에서 열차로 여행을 하며 촬영한 것을 현장에서 현상태 노동자들에게 보여 주었다.
2차 대전 직후의 자금난 때문에 열성적인 유럽의 영화감독들은 극영화를 만들 수 있을 때까지 다큐멘터리에 전념해야만 했다. 알랭 레네, 조르주 프랑주, 아녜스 바르다 등의 프랑스 감독들과 영국의 켄 러셀 등이 이러한 범주에 속했다. 이들이 비록 중요한 정치적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하나의 운동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다음의 중요한 발전은 1960년에 일어난 프랑스의 시네마 베리테 그룹과 미국의 다이렉트 시네마 그룹의 등장이다. 2가지의 기술적 발전이 이러한 다큐멘터리들의 등장에 기여했는데, 그것은 바로 텔레비전과 가벼운 카메라다. 텔레비전 뉴스는 생생한 이미지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고, 가벼운 카메라는 기동력 있게 현실을 포착할 수 있었다. 초기의 다큐멘터리 전통들은 여전히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데, 1961년 여름의 파리 시민의 일상, 독일 점령에서의 프랑스 국민의 경험, 또는 미국 탄광 노동자의 파업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보통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증언했다.
1970년대의 자유주의 분위기 속에서 서구 사회에서는 많은 영화 제작 집단들과 독립 영화인들이 기존 체계에 도전적인 다큐멘터리들을 만들었다. 특히 페미니즘적인 영화들이 많이 제작되었고, 이것들은 여성 개개인의 삶, 모성, 매춘 등의 주제를 다뤘다. 흑인 여성과 다른 유색 인종 여성들도 처음으로 영화 제작 과정에서 확고한 발판을 만들었다. 레즈비언과 게이 영화감독들은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하나의 목소리를 발견했고 자신들의 삶의 방식뿐만 아니라 게이 정치학까지도 다루었다. 이 기간에 크게 문제가 된 주제들은 낙태와 성 정체성, 인종주의, 경제적 착취 등이었다.
1980년대는 비디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유럽과 미국에서 많은 집단들과 실습 작업들이 출현했다. 또한 비디오 기술의 발전은 카메라의 더욱 광범위한 민주화를 불러일으키는 한편, 표현 양식을 찾는 주변부의 목소리에 기회를 제공했다. 텔레비전 방송의 변화도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케이블과 위성 방송의 도래는 특정한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을 포함해서 프로그램에 대해 보다 많은 수요를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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